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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보고 듣고 만지고 먹어보고 느끼는 감각의 종합예술이다. 긴 문장과 현란한 미사여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사진으로 시각적으로나마 방문하시는 분들도 함께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진은 아이폰으로 촬영해서 그리 아름답지 못하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냥 떠났다. 복작대는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남부터미널로 갔다. 목적지는 충남 부여. \11,000. 부여로 떠나는 비용은 저렴했다.



유난히 날이 맑은 날이었다. 마치 봄처럼.



마침내 도착했다. 서울에서 약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조그만 터미널이 정겹다. 부여夫餘. 백제는 한 때 남부여南夫餘라고 국호를 바꾸기도 했고 왕족들은 부여씨夫餘氏를 썼다. 스스로가 멀리 북방의 부여에서 온 선조들의 자손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지금 충남의 그들 옛도읍에 지명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타지에서 특별히 찾는 메뉴가 없다면 기사식당을 가라던 조언을 참고해 찾은 '한X식당'. 백반전문이란 말에 들어갔으나 생각보다는... 사진 중에 제일 괜찮았던 메뉴는 시원한 동치미였다. 백반 \6,000.



식사를 마치고 부소산성扶蘇山城 가는 길. 어릴 적 살았던 집과 비슷하게 생긴 집이 있어서 찍어봤다. 아파트갑만 넘실 대는 도시를 벗어나니 이런 집도 눈에 들어온다.



부소산성 입구에 다다랐다. 사비 천도 538년에서 660년 멸망 때까지 백제의 도성이었던 곳이다.



부소산문扶蘇山門이 기다리고 있다. 입장료는 \2,000. 국가유공자나 장애인, 충남도민 등 적용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을 둘러싸고 있다. 동쪽 아니면 서쪽으로 돌아도 결국 같다. 동쪽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산책길 초입. 중년 부부의 뒤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좋지? 응응?"이란 아내의 채근에 무뚝뚝하지만 내심 좋은 목소리로 "그렇지 뭐"라 대답하는 부끄럼 많은 남편.



잠시 뒤. 삼충사三忠司가 보였다.



사당 앞에 서봤다. 삼충사는 백제의 세 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그 세 명의 충신이란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이다. 백제 의자왕 20년 소정방이 이끈 15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대군이 사비성을 향해 몰려왔을 당시의 이야기다.


성충(成忠)은 656년 좌평(佐平)으로서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성공적 공략에 도취되어 음란과 향락에 빠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간했으나 옥에 갇혔다. 옥에서 죽기 전에 글을 올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한마디 하고 죽겠다. 시국의 사변들을 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한데, 반드시 상류에서 대적을 맞이해야 보전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또는 炭峴, 충남 대덕군)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험준한 곳에 의존하여 적을 막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흥수(興首)가 다시 한번 이 방책을 권했으나, 의자왕은 듣지 않고 다른 곳에서 적군을 맞은 결과 패배하여 도성이 위급해졌다. 결국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하며 웅진성(熊津城:공주)으로 피난하고, 둘째 아들 태(泰)가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저항했으나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이에 의자왕이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부여의 삼충사(三忠祠)에 계백·흥수와 함께 성충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2s0977a)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한다. 하지만 의자왕이 이들의 충정과 간언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들의 곧은 충정을 기리듯 사당 옆에는 조그만 대숲이 꾸며져 있다.



호젓한 산책길을 걸으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그윽한 솔향기가 마음을 산뜻하게 해줬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나지만 가끔 뒤를 돌아보곤 한다. 앞만 보고 서둘러 달려가기에는 놓치고 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부소산성 옛 군창터. 탄쌀이 출토되어 이 곳이 군량미를 쌓아뒀던 창고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백제의 명운과 함께 타버린 쌀들은 그 날의 참담함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빈 터로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다.



군창터에서 내려와 조금 걸으면 반월루半月樓가 보인다. 반쯤 찬 달을 바라보기에 좋은 누각이다. 누가 지었는지 이름을 참 풍류있게 잘 지었다.



반월루에서 바라본 백마강白馬江.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낙화암落花巖 위에 자리한 백화정白花亭. 1922년에 부여군수가 세운 것이라 한다.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



낙화암 위에서 (백화정은 낙화암 위에 세워진 정자고 낙화암과는 다르다) 바라본 백마강.



어라? 유람선이 떠 다닌다. 타봐야겠다.




선착장 가는 길에 고란사皐蘭寺란 절이 있다. 절 초입에는 세속의 사람들이 남겨두고 간 욕망들이 한더미나 쌓여있다. (포토에세이에 몇 마디 써뒀다)



극락보전 안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흰 장삼을 걸치고 있는 부처님이 특이해 보였다. 불교에 조예가 없어 어떤 부처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절집의 고요를 깨는 작은 종의 맑은 소리가 속세 욕망에 찌든 마음을 씻어주는 듯 하다.



고란사 극락보전의 뒤에는 전설의 '고란초 약수터'가 있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소부리의 한 마을에 살았다. 이 부부는 늙음을 한탄하며 회춘하여 아이를 갖기를 희망했다. 하루는 할머니가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고란초의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 나온 물을 마시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할아버지를 보내 고란약수를 마시게 했더니 할아버지는 없고  갓난아이가 할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었다. 도사가 말하기를 한 번 먹으면 3년이 젊어진다고 했으나 할아버지가 너무 많이 마셔서 갓난아기가 된 것이다. 할머니는 아이가 된 남편을 데리고 와 잘 키워서 훗날 백제의 장군이 됐다는 설화다.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고란정 약수다. 고란약수터 옆에 자라는 고란초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임금이 항상 궁녀에게 고란사 뒤편 절벽 바위에서 샘솟는 고란약수를 떠오게 했는데, 고란약수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서만 자라는 고란초 이파리를 띄워오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란초가 없다. 이영돈 PD처럼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고 마셔봤다. 음... 과연 물맛이 좋다. (옆에는 충남도지산가 부여군수인가가 수질이 음료로 적합하다는 보증서도 철판으로 달아뒀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3년이 젊어지지는 않았다...



통통통. 배가 떠나려고 한다. 서둘러 선착장으로 뛰어갔다.



"탈 거에유?"


"아, 네!"


떠나려던 배 겨우 잡아탔다. 편도 \4,000.


백마강을 통해 부소산과 부소산성을 떠났다. 1부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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