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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예담 | 2009-07-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다 그럴 듯한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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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호남의 항구도시 목포로 영화 <클래식>의 엑스트라 알바를 갔었다. 배우 손예진의 팬이었던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어쩌다 간 건데 알고보니 <클래식>의 한 장면을 찍기 위한 엑스트라였다. 날 끌고간 친구야 지금은 와이프에게 잡혀 꼼짝 못하는 아저씨가 됐지만 그 당시에는 손예진과 결혼하겠다고 프로젝트를 꾸미던 엉뚱한 친구였다. 그 덕에 배우 손예진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친구는 연방 '이쁘다 이쁘다'를 내뱉었고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는 내내 "이쁘지 않냐?"를 연발했다. 사실이 그랬다. 손예진의 미모는 뛰어났다. 거기 왔던 많은 남자 단역들 중 손예진의 미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난 사실 멍 했다. '이쁘긴 한데 뭐 어쩌라고?'라는 심정이랄까. 왜들 난리인지 몰랐다. "손예진이란 사람은 당신들 개개인을 기억도 하지 못할 뿐더러 알지도 못하는데 왜 그리 난리슈?"라고 묻고 싶었다. 인간 손예진과 아무 관련이 없는 개개인들이 뭘 알고 그리 그녀에게 환호했을까. 답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녀가 '예뻤기 때문'이다. 인간의 다섯개 감각 중 겨우 하나인 시각이 '와, 이쁘다'고 반응한 순간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이 마음 속에 쿵 들어와 앉는 것이다. 혹여나 그녀가 굉장히 오만하고 배려가 없는 인간이라도(손예진 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난 그녀를 모른다) 그걸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쁘면 용서된다'는 수컷들의 믿음을 저버리기에 시각이 느낀 흥분이 너무도 강렬하다. 언젠가 의사인 친구가 '얼굴이나 몸매는 살의 장난일 뿐이야'고 말해줬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거의 매일 살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살의 장난에 놀아나는 우리의 감정을 고찰한 소설이다. 이 사회에서 '못생긴 것'이 사랑 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과정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섬세한 감정선으로 묘사했다. 잘생긴 아버지가 유명해지자 버림받은 못생긴 어머니의 아들인 '그', 빼어난 미모로 재력가의 첩노릇을 하다 버림 받은 어머니의 아들 '요한',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얼굴 태어나 고통받으며 살아온 '그녀'. 세 사람이 백화점 지하 4층 주차장에서 만나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이자 내면이다. 위선자들은 외모에 의해 평가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은연 중에 외모로 차별하는 세상을 부추키고 있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시시할지도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한 인간의 방에 엠파이어스테이트나 록펠러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어? 즉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거야.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10, 219p.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생기고 이쁜 것, 즉 아름다움에 환호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들의 화보를 훔쳐보고 그들의 공연에 참석하며 그들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시간을 소비한다. 잘생기고 이쁜 그 혹은 그녀가 할 역할은 우아하게 올라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고 말하는 정도다.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의 가사 한 구절처럼,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고 묻고 싶지만 사실 관심도 없을거다. 그렇게 살의 장난에 의해 누군가는 팬들이 모아준 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만큼 빛을 잃은 루저들은 부끄러움과 부러움, 열등감이 뒤섞인 암흑의 강 어딘가에서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빛을 조공으로 바친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도 자신의 빛으로 빛나는 스타들에 환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무수한 사랑이 여름날의 반딧불처럼 모이고 모여든 거야.

 

....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그들에게 몰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10, 185~186pp.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독자는 깨닫는 바가 있겠지만 내일 당장 무엇이 바뀌지는 않을 거다. 그래왔듯 여전히 브라운관에는 찍어낸 듯이 오똑하고 빵빵한 미녀들이 서로 봐달라고 아우성일테고 모니터에는 그들의 화보가 넘쳐날 것이다. 그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소비할 아름다움은 차고도 넘친다. 대다수가 불행해지는 이 게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이름으로 계속된다.

 

가끔 눈을 감아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촉각과 청각만으로 사람과 세상을 느껴보는 것은 상당히 색다르다. 아름다운 외모의 그나 그녀가 보잘 것 없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눈에 띄지 않았던 그 누군가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살의 장난을 간파한 진실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거의 대부분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간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건 섣부르다. 요한의 입을 통해 벗겨지는 한국사회의 지저분한 옷가지들은 한 두벌이 아니다. (사실 요한의 말이 가장 공감이 간다) 돈에 대한 욕망,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남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등등 다양한 욕망들이 '외모'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대표됐을 뿐이다.

 

개발을 내세운 여당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가을이었다. 어머니 안 계시니? 선거 전부터 문을 두드리던 아줌마들과, 삼삼오오 모여 집값이 오를 거라 좋아하던 동네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개발대상 지역의 대부분 땅이 그 후보의 소유임을 안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익을 본 것은 누구였을까? 그건 정말

 

이상하네요? 아니, 당연한 거야.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10, 156p.

 

이 지겨운 게임이 얼마나 더 굴러갈까. 사실 이 사회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욕망을 보면 동력은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남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어야만 행복을 느끼는 이 불행한 사회에서 누가 승자인가. 영원한 승자도 없이 패배자의 어두운 그림자를 등에 업고 사는 대다수가 무표정하게 버스에 가득차 있을 때마다 숨이 막혀온다. 그 답답함과 외로움에 홀로 지쳐있는 당신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이래봬도 아직 여기엔 사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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