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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저자
권정생 지음
출판사
창비 | 2012-04-25 출간
카테고리
아동
책소개
- 북트레일러유튜브: http://youtu.be/7RMTF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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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의 눈길을 빼앗은 지가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본다. 내심 자신의 아이가 게임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부모라면 다들 비슷한 것 같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 자신의 독서량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고 읽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충 신문이나 정체불명의 인터넷 소스에서 발췌해온 '추천도서' 목록을 참고하기 마련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채.


얼마 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의 스마트폰을 빼앗아 게임에 열중이던 아이에게 엄마는 책, 정확히는 <몽실 언니>를 읽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엄마의 끈덕진 설교에 아이가 한 마디 내뱉었다.


"엄마, <몽실 언니>가 어떤 내용이야?"

".....!"


엄마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가 착한 언니가 동생들을 돌보는 이야기라고 말해줬다. (그럼 <레 미제라블>은 회개해 착해진 아저씨가 남의 딸을 돌보는 이야기란 말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대답이었다. (예전에 드라마로 만들어져-시점이나 핀트가 다르게 그려지기는 했다-방송된 적이 있는데 불행히 엄마는 그 내용을 기억하기엔 젊어보였다) 아이는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조용히 스스로 <몽실 언니>를 읽기 시작했다.


요즘의 세태를 대표하는 에피소드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휴대폰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책조차도 쉽게 빌려보기 어렵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서점에서 절반 정도를 읽고 눈치가 보여 나온 다음에 다시 작은 도서관에서 나머지를 마저 있었던 <몽실 언니>의 추억도 그 시절의 기억이다. 이번에 다시 읽어본 <몽실 언니>는 심지어 그 당시에 내가 읽었던 구판이어서(심지어 출판사 이름도 그 시절 '창작과 비평사' 그대로 씌인 1990년 개정판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유시민이 <청춘의 독서>에서 말했듯이, 과거에 읽었던 작품을 지금에 와서 읽으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안목이 좀 더 생겼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 시절에는 단순히 몽실을 고난과 역경에 처하게 만든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몽실에 대한 동정을 느꼈다면, 지금은 몽실을 모진 운명에 던져버린 이 사회와 역사에 분노하게 된 게 조금 다르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과 희노애락의 감정이란 것이 아이가 다르고 어른이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니.


<몽실 언니>를 쓴 고故 권정생 선생은 1984년 작품을 완성한 뒤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끔 운동장이나 골목길에서 조그만 아이들에게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는 것을 봅니다. 뒤에서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자꾸 이간질하고 부추겨서 결국 치고 받고 싸우게 만듭니다.

그럴 땐, 싸우는 아이들보다 뒤에서 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이나 돈을 훔친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며 욕을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몽실이라는 주인공도 한쪽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 것을 아이들이 놀려 줍니다. 몽실은 자기가 절름발이가 되고 싶어 일부러 다친 것도 아닌데, 결국은 남의 놀림감이 되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도 일부러 도둑이 되고 싶어 훔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들을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듯이, 도둑질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일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까닭은 덮어놓고 도둑놈만 나쁘다고 욕하고 벌을 줍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딴데 시집을 간 어머니도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을 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실은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라나면서 몸소 겪기도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배우면서 참과 거짓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만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

몽실 언니는 제가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쓴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어 주셔요.


1984년 4월 지은이


100판이 넘게 찍혀서 팔렸고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방학 때면 독후감 숙제를 쓰기 위해 단골로 선택하는 <몽실 언니>.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몽실이 선택한 선善과 惡의 기준은 지금도 우리가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도덕윤리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세상은 갈 수록 흉흉해 질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남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한다. 제가 정하지도 않은 남의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지역, 피부색, 성정체성 등을 기준이랍시고.


검둥이 갓난아기는 조그만 까만 주먹을 꼭 쥐고 줄곧 울었다. 몽실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에잇, 더러운 것!"

어떤 남자가 침을 뱉으며 발길로 찼다. 아기가 자리러지게 울었다.

"안 되어요!"

몽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아기 쪽으로 가리고 섰다.

"비켜! 이런 건 짓밟아 죽여야 해!"

"화냥년의 새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제각기 침을 뱉고 발로 쓰레기더미를 찼다.

몽실은 다급하게 아기를 덥석 보듬어 안았다. 강아지처럼 새까만 덩어리가 손에 말캉거리며 집혔다.

"넌, 대체 누구냐? 그 새끼 내려놔!"

"웬 계집애가, 정신 있냐?"

몽실은 얼른 아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빠져 나왔다. 사람드은 줄곧 무언가를 소리지르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몽실은 열 걸음쯤 달아나서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곤 애원하듯이 꾸짓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

사람들은 몽실이 하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몽실은 재빨리 아기를 안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 권정생, <몽실언니>, 창작과 비평사, 1990, 168~169pp.


악랄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지 몇 해도 되지 않아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저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그 시절의 암울했던 단면이다. 하지만 못나고 나쁜 건 지독하게도 유전된다.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난리 속에서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적국 청淸으로 보내야만 했던 조선여인들이 살아돌아오자 더욱 박대를 당했던 흑역사는 다시금 재현됐다. 화냥년으로 취급돼 남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고, 그녀들의 자녀들은 더욱 혹독한 차별과 편견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진: 연합뉴스)


오늘 장례를 치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선순 할머니의 한恨 많은 삶도 마찬가지다. (관련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8/26/0200000000AKR20130826089500055.HTML?input=1179m16살에 일본군에 납치돼 위안부 생활을 했던 할머니께서는 자식들 장래 망칠까봐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기고 사셨다. 할머니가 가슴을 치며 생전에 하신 말씀은 "한국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 마음 아프다"였다. 부끄럽다. 아무 힘 없는 열 여섯 소녀를 지켜주지도 못한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서야 살아 돌아온 그녀에게 또다시 소금을 뿌린 과거는 일제를 탓하기에 앞서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라며 사람들을 가로막은 몽실이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작품 속 몽실은 새엄마였던 북촌댁과의 약속을 지켜,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참아가며 성장한다. 하지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몽실처럼, 혹은 몽실이 지켜봤던 사람들처럼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숨기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태연할 지 몰라도 속으로는 피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인간들은 여전히 많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데올로기나 출신지역을 가지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여성이나 성소수자는 아예 인권의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는 인간들이다. (일베하는 너 말이다) 어렸을 때, <몽실 언니>를 읽지 않았거나 잘 못 이해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것 같다. 앵똘레랑스 덩어리인 극우주의자들에게 베풀 똘레랑스는, 유감스럽게도 '없다'.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만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는 권정생 선생의 말이 머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스스로 <몽실 언니>를 읽기 시작했던 엄마는 나중에 아이에게 몽실의 어떤 면을 배우라고 가르칠 지 궁금하다. "우리 아이 1등 만들기"에만 골몰하는 요새 엄마아빠들이 먼저 읽고 토론을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어른이 읽는 <몽실 언니>는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더욱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과연 나는 부모가 됐을 때 어떤 가르침을 아이에게 줄 수 있을까... 벌써 부터 긴장되고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故 최선순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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