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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저자
류동민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3-05-1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우리 시대에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을 움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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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이야기다. 한 여자후배(S라 하자)와 몇이 모여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어떤 패밀리레스토랑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 담소를 나누며 한참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그곳 종업원이 내온 새로운 음식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자기 또래쯤 돼 보이는 그 종업원(앳된 얼굴이 아마도 십중팔구 아르바이트생이었을 거다)에게 호통을 치던 후배 S의 모습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지나 문제의 상황이나 식사했던 패밀리레스토랑의 브랜드는 가물가물하지만 이 한마디는 정확히 기억난다.


"이봐요! 손님은 왕인데 말이야, 지금 내 돈 주고 내가 밥 먹는데 이따위로 할 거에요?!"


왜 이 한마디가 지금도 라이브 영상처럼 머리 속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전근대시대 양반댁 안방마님이 부엌데기를 불러다 꾸짖듯이, 큰소리로 호통치는 후배 S앞에서 별다른 죄를 짓지도 않은 아르바이트생은 그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러고서도 후배 S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불평을 늘어놨었다.


갓 대학에 들어온 그녀의 행동은 사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다. 일단 서울 목동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녀의 환경을 생각해본다 쳐도, 스스로가 말한 '내 돈'은 사실 그녀의 부모가 벌어다 무상으로 증여한 돈일뿐 그녀가 번 돈도 아닌데 마치 그 돈을 자기가 (애써서) 번 것처럼 생색내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손님은 왕'이라며 종업원을 꾸짖는 이 20살짜리 아가씨를 앞에두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기엔 너무한 부분이 있었다.


S를 바라보면서 사실 내 속에서는 '네가 만일 지금보다 덜 윤택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네가 저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진 욕을 듣고 있었을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부유한 집의 자녀인가에 따라 그 시기와 방법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거의 대다수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필연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계걱정 없이 살아온 이 아가씨는 소비자로서의 태도를 지니고 있을 뿐,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됐을 그녀가 '일하기 전엔 몰랐던 노동자로서의 자아'를 지금쯤은 가졌을까?


류동민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이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이제 갓 사회에 발을 내딛은 사회초년생이나 대학에서 소비문화의 단맛에만 익숙해진 대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원래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충남대 경제학과 류동민 교수가 쓴 글이라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지만 상당히 균형을 잘 잡아서 썼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분석하는 틀 역시 (맨큐의 경제학 정도되는) 주류경제학이기 때문에 경제학원론 정도를 이해한 독자라면 아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미덕은 저자의 일상적인 경험과 누구나 겪는 한국사회의 편린들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에 '쉽다'는데 있다. '경제학'이라는 말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사회초년생이나 대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것은 이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에 갓 뛰어들었거나 뛰어들 그들에게 유용한 조언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이미 수년 간 직장과 사회에서 조직생활과 인간관계의 험난한 생활을 거쳐온 이들에게는 이미 체득돼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아직 '일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시대 노동이 어떻게 교육되고 생산돼서 무슨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보는 것은 학점 조금 더 받는 것보다는 분명 남는 장사일테다.


이미 정치권력과 결탁한 자본은 대학은 물론 사회문화 전반적인 영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위치에 섰다. 교육은 대학수준에서까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배출해 취업이라는 열매를 하나라도 더 따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기업이 진짜로 원하는 스펙 "'말 잘듣는 노동력'을 얼마나 배출했느냐"는 어느 대학이나 '취업률'이란 수치로 교시敎示화 돼있다. 아예 재벌기업이 대학을 직접 장악하는 사례도 있으니 진리의 상아탑은 이미 취업의 상아탑이 된지 오래다.


중요한 사실은 대중교육으로서 대학 교육에서는 칸트나 마르크스를 읽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드는 기능보다는 노동자를 양성하는 기능이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기능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영어나 수학보다는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잇는 기술을 중시하듯, 자동차 운전학원에서 자동차의 역사나 철학적 의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듯, 대학은 학생들이 졸업한 뒤에 노동시장에서 공중제비를 잘 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목숨을 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이 험난한 경쟁을 뚫고 영광의 입사를 이뤄낸다고 해서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수십 년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첨단 기기들과 통신장비의 등장으로 '근무시간에 일하고 그만큼 임금을 받는다'는 전통적 사고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제 출근과 퇴근의 구분이 모호해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하는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은 이제 작업장 안에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시간, 개인적 삶의 시간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일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일이 되는 '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다보니 모든 것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노동이 벗어나기 어려운 고역으로 뒤바뀌게 된다. 삶은 곧 일하기 위한 것이 되는 기막힌 전도가 이뤄진 것이다.


회사를 퇴직하고 퇴직금을 받아 카페를 차린 사장님의 삶을 보면서 안도하기에도 이르다.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에서 진한 커피향 속에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멋진 내 가게의 사장님 꿈을 꾸고 있다면 <골목사장 분투기>에 관한 포스팅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http://grauezone.tistory.com/74사장님의 정체는 '망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잠을 줄이고 알바생 월급을 주기 위해 부업을 뛰는 '영세자영업 노동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가게에 달라붙어 높은 임대료와 자신의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해 불철주야 노동하는 모습에서 우아한 자영업자의 이미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사무실을 벗어나도 일할 수 있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거꾸로 일이 놀이를 집어삼키고 일터가 쉼터를 파고들어 '죽도록 일하고 겨우 먹고살기'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 곳에서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뒤집어서 '어디에서건 일해야 한다'라고 바꾸면 이는 저주가 된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이런 현실은 소위 1997년 체제로 일컽어지는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이론이 득세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자본의 입장에 충실하면서 노동의 관점을 철저히 소외시킨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본의 사주를 받은 학계와 출판, 방송, 신문 등을 장악했다. 이제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하는 소상인마저도 대기업 CEO의 마인드를 갖춘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게 된다. 지난해 말 광장시장에서 현재의 대통령이 후보시절, 무조건 그를 찍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영세하기 그지 없는 부침개 장수 아줌마가 그랬듯이. 아주머니 역시 자녀 대학의 살인적인 등록금 때문에 고민 중이라면서도 자본과 권력의 논리를 주장하는 이 모순적인 태도야 말로 오늘의 비극을 낳은 씨앗이다.


노동자 자신이 소비자라는 또 다른 자아로서 스스로에게 맞서는 아이러니가 해소되지 않으면 어떤 진보적, 민주적 구조 개혁 의제도 무의미한 주문에 그칠 수 있다. 공공성과 민주주의적 가치 확장과 그 대중적 확산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의제여야 하는 것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예비 노동자기도 했던 후배 S가, 광장시장에서 영세한 부침개 장사를 하면서 자식 대학등록금에 허덕이던 아주머니가 스스로의 모순을 해소하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결국 '좌빨의 선동'이 되버리기 십상이다. 스스로가 소비자이기 이전에 노동자라는 주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장악하지 못하는 이상, 노동자는 자본의 농간에 놀아나고 그 몫은 고스란히 trickle-up하게 된다. 우리는 그랬던 5년을 지냈고 또다시 그런 5년을 예약해서 살아가고 있다.


좋건 싫건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울프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과 죽을 때 사이의 성인기에 내내 종사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민주주의가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면, 삶의 큰 몫을 차지하는 노동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상점, 공장, 사무실 등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의 모든 민주적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고 맙니다."


......


혹시 우리는 민주주의란 선거에서 누구를 찍느냐 하는 문제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흔히 말하는 생활상의 민주주의조차도 '밥줄'을 위한 직장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듯 살아오지 않았을까?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하다가 몇 년에 한 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일까?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일과 일터는 일상생활을 지배한다.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꼴불견이 바로 소비자란 갑질, 원청이란 갑질을 해대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 아버님께서는 이를 '지주보다 마름이 더 미운 법이다'고 하셨다. 그렇다. 노동자란 자아를 잊고 자본의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거나 손님으로서 신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을이나 병쯤 되는 노동자일 것이란 사실이다. 그랬던 을이나 병이 바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질문들이 게으르고 비겁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아프게 찌른다. 우리 일상의, 직장에서의 민주적 질서 도입이란 말조차 낯설지 않은가?


자본이 만들어놓은 이 비인간적인 게임에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 무력한 우리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하기 전에 몰랐다면 일하는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서도 딱히 대안은 없다. 어차피 답이란 없는 것이고, 시대와 사회의 변화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개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고작 한 사람의 생각이 정리된 책에서 금새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니까. 다만 저자가 남긴 제언은 참고할 만하다. 좀 길지만 옮겨본다. 저자의 제언을 마지막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대한민국의 일하는 모두를 응원한다.


<크랙 캐피탈리즘>이라는 책에서 존 홀러웨이는 우리들 모두가 시장 매커니즘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일상에서의 균열 내기를 강조한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원용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즐거움과 보람의 요소, 타인의 '일'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조금씩이라도 키워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맞설 때 가끔씩이라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도록 노력하는 것, 비정규직 노동을 반면교사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배려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소중한 순간으로 받아들이기는 것,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잠깐씩이라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의 일과 삶을 더디게나마 바꾸어나갈 것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웅진지식하우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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