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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저자
버트런드 러셀 지음
출판사
사회평론 | 2005-04-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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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에 10여년 전 아버지 모습의 데자뷰를 목격했다. 그건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던 친구에게서였다. 이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하는 그 사이의 2~3개월 텀을 무척 괴로워했다. 실직 중이라는 불안감이라기보다는 뭔가에 쫓기는 듯한 초조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10여년 전 외환위기에서도 직장을 유지하신 아버지가 결국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수십 년 다닌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해고가 된 아버지의 반응이 딱 그랬다. 근면과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아파도 회사 하루 쉬면 큰일나는 줄 알고 수십 년을 살아온 산업역군은 막상 휴식과 자유가 주어지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산업화 세대인 아버지는 그렇다쳐도 그 모습이 그 아들세대인 친구에게서 보였을 때는 내가 당황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쌍둥이적인 반응은 한국사회가 교육을 통해 각 개인에게 '근면과 성실'이란 미덕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증거다. 일하는 것 외에는 뭐든지 '논다'고 표현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괜히 형성된 것이 아니다. 획일화, 집단화 된 국가교육은 근면 성실한 산업역군을 양성하는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국민 각 개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철저히 회사형 인간이 되어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듯 보여도 가정에서는 철저히 소외되는 중년 가장의 모습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이란 글에서 일찍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트 러셀, 송민경 역, 사회평론, 2007, 18p.>

물론 지금 한국사회에서 러셀과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비웃음을 사기 좋을 것이다.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노동시간으로 1,2위를 다투면서도 직장을 제공하고 급여를 지급하는 회사에 감사하는 대표적 워킹홀릭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러셀이 이 글을 발표한 1930년대 영국에서도 많은 영국인들이 러셀을 비웃었다고 하니 그의 생각은 분명 인류를 지배하는 근면과 성실의 미덕에 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근면과 성실이란 미덕이 누구의 의해서 누구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인가를 고찰한다. 이 과정을 통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헤게모니를 쥔 세력들이 피지배 계층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활용해 왔음이 드러난다. 잘 생각해보자.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근면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설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그들이 말하는 만큼 그네들의 삶이 근면하고 성실했는가를 따져보면 실제로는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종교기관에서, 언론사에서 끊임없이 근로의 미덕을 주입해대는 사람들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부지런하라고 세뇌시키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시를 할 뿐이고 상대적으로 많은 여가를 즐기며 더 높은 보수를 챙긴다. 근면과 성실을 통해 GDP는 증가하고 수출은 잘된다는데 야근과 주말근무를 마다하지 않은 내 월급은 쥐꼬리만큼 오르거나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실질 가처분소득이 감소하는 모순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근로의 미덕에 철저히 세뇌된 사람일수록 성급하게 "그럼 게으르란 말이냐?"고 질문해 올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하자면 "그렇다"이다. 러셀이 든 사례를 먼저 소개하겠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이를테면)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 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 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이때 지각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 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나고,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결국 모두 4시간씩 일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만큼의 여가가 창출된 셈이다. 그러나 인력의 절반이 완전히 손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이보다 더 정신나간 짓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트 러셀, 송민경 역, 사회평론, 2007, 22p.>

기술의 진보와 생산양식의 변화, 조직관리의 효율성 등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고 인류의 생산력은 인류사 그 어느 때보다 급격하게 증가했다. 러셀 자신도 이미 1930년대의 인류 생산력만으로 전인류가 잘 먹고 살 수 있다고 추정했다. (러셀은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수학자이기도 하고... 이것 저것 많이 한 학자다)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량 증가는 폭발적이라는 인구증가를 능가할 정도로 가파르다. 그리고 러셀의 비유처럼 인류가 소비하고도 남을 생산량을 확보하는데 이전처럼 많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다. 10명이 하던 일을 5명이 해도 되는 것이다. 10명이 5명 몫의 업무를 나누어 분담하면 10명의 사람은 절반의 일만 하고도 같은 생산량을 배출할 수 있다. 따라서 절반의 시간을 일하고 남는 절반의 시간은 그대로 여가의 시간이 되어 '게을러도' 되는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며 독서와 스포츠 등 각자의 취미활동을 통해 삶의 질을 현격하게 높일 수 있는 여가시간을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의 만족도를 위해 필요한 여가시간을 충분히 가질 물적토대도 앞의 예시처럼 이미 갖춰져 있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는데 안하는 거다. 인원을 그대로 유지해봐야 급여명목으로 지출되는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그 책임이 뭔지도 무척 애매하지만 자기 직원 막 자르는 것도 사회적 책임을 유기한 행위 아닌가-은 다하겠다면서 노동자 함부로 해고하지 말라고 하면 '기업이 복지단체냐?'는 항변을 하는 이중적 태도는 실상 바로 그 돈 아껴서 누가 먹으려고 하니까 그런거다. 정말 망할 것 같아서 해고하는 회사가 몇이나 되는가.) 이상적인 경우는 러셀의 주장처럼 서로간에 업무를 분담하여 업무량을 낮추고 나머지 시간을 여가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은 인원들이 격무를 통해 과로하여 일하고 해고된 나머지는 하릴없이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한다. 이미 산업 전 영역에 걸쳐 이 현상이 진행됐기 때문에 해고된 사람들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현재 한국의 일자리 쟁탈 다툼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조에서 벌어지고 있다.

선대인은 그의 최근 저서 '문제는 경제다 (문제는 경제다, 선대인, 웅진지식하우스, 2012)'에서 "한국을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면, 안정된(정규직) 좋은 직장을 잡는 사람은 1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100명의 사람이 10개의 자리를 두고 무한경쟁을 펼치지만 기본적으로 90명의 사람은 패배자로 만들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게임이다. 90명의 패배자는 근면 성실을 강권하는 사회에서 무력감과 패배의식에 절어 지낸다. 잘 교육되고 근면과 성실을 그 DNA에 새겨진 한국노동자를 이렇게 홀대할 정도로 한국은 아직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다.

그렇다고 취업에 성공한 10명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OECD 정상급의 최장근로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입사원들의 경우에는 연애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결혼은 어떻게 하냐는 자조가 유행이고, 중간관리직이 된다 하더라도 야근과 주말근무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은 아빠를 낯설어한다. 그 어려운 취직관문을 통과해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가정과 가족에서 오히려 소외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쓸쓸한 이야기다. 누구나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멀어진 채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저 근면 성실한 근로자가 되어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한다. 그 조차도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이지 못하다는데서 비극은 정점을 찍는다.

회사 하루 빼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착하고 성실한 한국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세뇌를 의심할 수 있는 용기, 파악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용기, 그로 인해 조그마한 변화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경로의존성에 따라 익숙해진 그 방식과 그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것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 낯설고 의심이 생긴다. 하지만 두렵다고 지금에 안주하면 이보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는다. 지금 이 룰에서 누가 부당하게 많은 몫을 차지하고 땀을 흘리지 않는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그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겠다는 개척자의 모습이 필요하다. 그런 용기들이 모여야 잘못된 도그마를 제거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잠깐 왔다 떠나는 당신의 삶을 행복하게 바꿀 수 있는 첩경이다. 조금 더 나아가 당신 스스로 뿐만 아니라 맑은 눈망울로 커가고 있는 당신의 아이와 우리의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이제 선택의 칼은 당신의 손에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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