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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못 다한 이야기

저자
KBS 징비록 제작팀, 최희수, 조경란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5-03-1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KBS [징비록] 제작팀과 자문 교수들이 펼쳐내는 또 하나의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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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배운다 - 징비록 시리즈 2편] (이번 시리즈는 총 3편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영화 <명량>이 개봉하고 한참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칼의 노래>의 저자인 소설가 김훈의 인터뷰가 어느 매체에 실렸습니다. 김훈은 영화 <명량>을 두고 "일본의 장수들을 너무 희화화 했다"는 평을 남겼습니다.1)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야 침략군인 왜군을 아름답게 그려줄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관계를 지나치게 넘는 연출은 자칫 역사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자학적 사관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위적 사관 역시 올바른 역사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KBS의 역사드라마 <징비록> 역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군을 희화화 하려는 시도는 가토 기요마사의 캐릭터를 연출해 내는데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조선의 장수인 이일 또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요. 게다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충주 전투에서 신립이 이끈 조선군과 싸워서 8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해설은 역사왜곡에 가깝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7천명, 고니시의 사위이며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의 5천명 등 충주전투에서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왜군 1군의 총병력은 상륙 당시 18,700명으로 알려져 있지요. 동래성 싸움 등으로 병력 소모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충주에서 가용한 병력은 그보다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8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고니시의 1군은 한양은 고사하고 충주에서 한 걸음도 진군할 수 없었을 겁니다. 보통 군의 편제에서 총병력의 1/3이 부상이나 사망으로 기동이 어려우면 전멸이라고 보는 것으로 미뤄봤을 때 충주에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양까지 진군한 왜군 1군에 8천여 사상자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드라마 <징비록>의 제작준비과정에서 이뤄진 징비록 제작팀의 문헌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이 <징비록, 못 다한 이야기>(이하 <못 다한 이야기>)는 책으로 엮여 나왔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드라마의 부족함을 훌륭하게 만회해 주는 책입니다. 선조실록과 그외의 풍부한 자료를 통해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도 충분히 녹여냈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전과 전쟁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무래도 시청률에 대한 의식과 제작예산의 제약 등으로 제대로 연출되지 않은 드라마보다 <못 다한 이야기>가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고픈) 제작진의 진심을 전하는데는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는 총 5개 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전에 벌어진 조선 내부의 갈등과 전쟁 대비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통신사의 파견과 귀국,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인 갈등 등 전쟁 전 조선의 정세와 분위기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잇따른 패전과 파천, 그리고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도망치겠다는 선조를 둘러싼 논란이 소개돼 있습니다. 3장에서는 명군의 개입과 평양성 탈환, 움직이지 않으려는 명군을 설득하려는 광해와 대신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4장에서는 무너진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각종 개혁과 시도들이 주된 이야기입니다. 세제의 개편과 군역의 개편, 인재 등용을 위한 제안 등 성사만 됐으면 국가를 부흥시킬 아이디어들이 많습니다. 마지막 5장에서는 명나라와 왜, 조선이 얽힌 동북아 외교전과 전후 처리문제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미 이 때 우리를 제외한 채 명나라와 왜가 조선을 분단시킬 모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 한숨이 나오실 것입니다.


간단하게 목차를 통해 소개해 봤으나 <못 다한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명과 왜가 한반도를 무대로 전쟁을 벌인 사실과 수 백년 뒤에 청과 일본이 조선을 무대로 다시 전쟁을 벌인 사실 / 선조임금이 백성들 몰래 한양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도망친 것과 다시 수 백년 뒤에 어느 대통령이 수도를 사수한다며 국민 몰래 남쪽으로 도망간 사실 등 시대만 다를 뿐이지 비슷한 점이 매우 많기에 참고할 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평행이론일지도 모르는 이 교훈들에서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반성하고 어제와 같아질 지 모르는 내일을 걱정합니다.


오늘 여기서는 제가 <못 다한 이야기>에서 주목한 한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것은 국방과 안보의 문제입니다. 본디 국방과 안보, 즉 국가를 지키는 일은 정부와 국민이 일심단결하여 적을 이기겠다는 굳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제 아무리 훌륭한 무기를 갖추고 있더라도 적을 만나면 패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고딘 디엠의 남베트남군이 최신식 미군 무기를 가지고도 폐타이어를 썰어만든 군화를 신고 싸운 월맹군에게 패배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지요. 2)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개전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 당합니다. 자동차와 같은 운송수단이 없던 당시로 보자면 개전 3일만에 수도를 점령당한 6.25전쟁에 버금가는 속도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부산진과 동래성, 상주와 충주 이외에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그 긴 진격로에서 제대로 된 저항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군은 거의 무저항으로 한양까지 내달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진관 체제를 포기하고 제승방략 체제를 선택한 군사체제상의 문제점에도 기인하지만, 실제로는 군사를 징발하고 통제해야 할 대부분의 지방 관리들이 그냥 도망가버린 문제가 컸습니다. 지방 관리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버리니 군사가 제대로 징발될 리 없었고, 어렵고 모은 군사도 다들 겁을 먹어 탈영하는데도 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들과 스님들까지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 거병하여 의병활동으로 목숨 건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동안 그 주체가 되어 지휘를 하고 무기와 식량을 지원해야 할 관리들과 왕이 그 역할을 하지 않았으니 민심이 이반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의 명장 이일은 1592년 6월 7일 올린 글에서 대동강 상류 지역의 삼등에 흩어진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신이 거느린 군졸들은 대가(주-왕이 머무는 일행)가 그대로 평양에 주재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 감읍하여 모두들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혹 흩어진 병졸을 만나면 모두 호령을 몰랐기 때문에 이처럼 도망한 것입니다. 만약 호령이 있었다면 어찌 도망갈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조선의 병사들이 무능한 조정일지라도 국가를 사수한다는 데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린 것이 당시 조선의 임금이고 조정 대신들이었다.


- KBS 징비록 제작팀, <징비록, 못 다한 이야기>, 글항아리, 2015, 110p.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에는 당시 조선의 정부였던 선조와 조정이 평양을 떠나 더 북쪽으로 몽진하려 하자 평양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왕실의 신주를 들고 떠나는 일행을 막아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한번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그저 눈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적이 두려워 미리 도망치려 했으니 백성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용맹하고 강인한 백성들을 거느린 왕과 조정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땅과 백성을 지키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없다면 그저 돼지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 일뿐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상시적으로 우리 안보의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한을 비롯하여,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국민은 어떤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 우리 정부는 어떤 전략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외국군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국방을 자신할 수 없다면 그 나라는 절름발이 국가일 뿐입니다. 설사 외국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그에 따른 보상의 요구와 철저한 국제적 배제와 외교적 불이익 뿐입니다.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구요?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습니다. 다음을 보시지요.


1593년 윤11월 명에서는 행인사 행인 사헌司憲이 사신으로 왔다.

...

사헌이 조선에 가져온 명나라의 칙령에 숨은 뜻은 '분할역치分割易置'였다. 즉 나라를 나누고 임금을 바꾼다는 이 주장은 조선의 복구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명나라 관료 사이에서 오갔던 말인데,

...

그러나 명에서는 다시 조선에 대한 조치 문제가 대두되었다. 분할역치가 여의치 않다면, 직할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명나라의 막대한 원조비용을 조선이 제대로 보전해주지 못한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나온 논의였다.


- KBS 징비록 제작팀, <징비록, 못 다한 이야기>, 글항아리, 2015, 234~236pp.


어떻습니까?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혈맹이라는 명나라 내부에서 이런 논의들이 오갔더랬습니다. 왕은 선위를 요구받을 지경이었고, 국토는 갈려질 꼴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며 내정간섭까지 직접 받아야 할 상황이었으니 이게 어디 정상적인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움은 나의 주체적인 힘에 추가적으로 더해지는 것이지, 그것이 나의 주된 힘이 되는 순간 나는 이미 내가 아닌 허수아비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 합니다. 흔히 정치판에서도 격언으로 쓰이는 말이지요. 이 냉정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500여년 전 피로 쓴 역사가 전하는 교훈이며,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국방을, 안보를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분들과 그 자제들이 앞장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우리의 약한 힘이라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한 곳으로 모을까를 궁리해야 하는 것이지요. 적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해서 권력을 유지하거나, 자신은 예외를 둬서 힘겨운 군역을 피하는 것은 나라를 위기로 몰아가는 반역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리더는 스스로 맨 앞에 서서 나머지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지, 군림하여 완장질 하는 사람은 조직폭력배의 보스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했던 국방과 안보 이야기를 하다보니 <못 다한 이야기>에 실린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조령 일대의 지리에 훤하던 충주사람 신충원을 등용해 조령에 다시 성을 쌓고 그로인해 정유재란 시 조령을 수비해 낸 이야기같이 독자님들이 관심을 가지실만한 이야기가 많으나 다 옮기지 못해 아쉽습니다. 사회,경제적 문제점과 이를 보완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제도들도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와 같이 픽션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논픽션에 가까운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독자님들이라면 잠시 시간을 내시어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1)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00 

2) CBS <변상욱의 기자수첩>, 3월 31일자 방송, "우리가 베트남 패망 직전과 비슷하다?"(https://itunes.apple.com/kr/podcast/id444654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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