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인간 불평등 기원론
국내도서
저자 :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 김중현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08.20
상세보기


오늘은 헌법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된 나라인지, 4·19가 항거한 불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헌법이 말해주고 있는 듯 하군요. 이제 11조로 가봅시다. 1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아마 최근에 영화 <내부자들>을 보신 독자시라면 기억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극중 등장인물인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가 건달 안상구(이병헌 분)과 자신의 고향집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 하는 장면에서 내뱉은 일성이 바로 이 헌법 제11조였으니까요.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 헌법조항을 두고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안상구처럼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한당가?"라고 냉소하지 않을런지요.


정치나 경제, 사회, 노동 등 거대담론의 아젠다에서부터 우리네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평등의 가치는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요? 정치적 폭력에서부터 사상적 폭력, 경제적 폭력, 심지어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로 회귀했고, 시민들은 일상의 폭력으로부터 자기검열과 단속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고 쥔 소수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요. 자유와 평등의 이너써클 밖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화 <내부자들>을 본뒤에 공감, 분노, 각성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소수'가 자유와 평등을 독점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평등은 무엇일까요? 평등이 소수에게만 독점되었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기계적 평등이 나라를 망친다"는 이념과잉화 교육을 통해 평등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뿐, 본래 평등의 의미와 가치를 교육받고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18세기를 살았던 한 철학자에게도 '평등과 불평등'은 규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던가 봅니다. <에밀>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 입니다. 그래서 루소는 일단 불평등을 파보기로 합니다. 불평등을 규정하고 그 폐해를 밝히려는 루소의 시도는 반대로 평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이 아닐까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사실 디종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논문공모에 응모하기 위해 씌여진 책입니다.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이 다음과 같았거든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즉, 루소는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답안을 적어낸 학생 같았던 것입니다. 물론 출제자들을 완전히 만족시킨 답을 적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제네바 공화국에 대한 긴 헌사를 마친 루소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평등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나는 인류에게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발견한다. 하나는 내가 자연적 혹은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이 자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으로, 나이·건강·신체적인 힘과 정신 혹은 영혼의 자질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혹은 정치적 불평등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일종의 합의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들 간의 동의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용납되기 때문이다. 이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해치고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이거나 더 존경을 받거나 더 세력이 잇거나, 또는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거나 하는 특권들이 그것이다.


-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66~67pp.


루소가 두 가지로 불평등의 형태를 나눈 것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1부와 2부로 나뉘는 이유가 됩니다. 1부에서는 자연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그려봄으로서 인간의 자연권과 자연적인 불평등을 고찰해봅니다. 2부에서는 인류의 발달단계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대로 도덕적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고찰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금한 것은 아무래도 1부보다는 2부쪽이겠지요. 현재의 불평등이 자연적으로 인간이 타고난 건강이나 신체적인 부분보다도 도덕이나 정치, 법률 등의 탓이 크다고 느끼실 테니까요.


따라서 1부를 요점만 짚고 가자면 아래의 대목을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즉,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은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해칠 욕구도 없었을 것이며, 그들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념에도 거의 지배받지 않고 자족하면서 그 상태에 알맞은 감정과 지식만을 가졌으며,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지능은 허영심만큼이나 발달하지 못했다. 설령 우연히 그가 어떤 발견을 했다손 치더라도 자기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만큼 더더욱 그 발견을 타인에게 전하지 못했다. 기술은 그 발명자의 죽음과 함께 잊혀 버렸다. 교육도 진보도 없었으며, 세월은 오랫동안 무용하게 흘러갔다.


그리하여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인류 초기에서처럼 전혀 발전 없이 흘러갔다. 인류라는 종은 이미 늙었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었다.


-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18~119pp.


존 레넌의 <IMAGINE>이란 곡을 아시는지요? 그 노래의 가사처럼 국가도, 종교도, 소유물도 없는 그런 상태가 떠오릅니다.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전쟁이나 교류도 없고, 그저 자신의 생체적인 힘을 이용해 먹을 것을 구하고, 그것은 먹고, 휴식을 취하며 흩어져 살았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불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정신이 발달하지 못한 자연 상태에서 불평등을 거의 감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루소는 이제 인간정신의 발달을 통해 불평등의 기원과 확대를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2부의 시작이지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서서히 문명을 일구어갑니다. 그리고 문명은 진보하기 시작하지요. 이제 지식은 그 다음세대로 전해지고, 인간의 의식은 소유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입니다. 홀로 숲이나 광야를 떠돌던 인간들은 차츰 큰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필연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이 관계는 서로를 구속하는데에까지 나아갑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원시시대를 넘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로 나아가며 초기적 국가의 형태와 계급이 등장하고 사유재산이 출현한 것과 같습니다. 루소는 바로 이 시점을 불평등의 초기발생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소유지가 대지 전체에까지 미쳐 모든 소유지가 서로 인접할 정도로 수나 넓이 면에서 증가했을 때 소유지는 오로지 타인의 소유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불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약함이나 나태로 자신의 소유지를 갖지 못한 인간들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는데도 그들만 변하지 않음으로써 가난하게 되거나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게 되어 부자에게서 먹을 것을 얻거나 약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각각의 성격에 따라 지배와 예속, 폭력과 약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83p.


단순히 힘의 우열이나 권력으로 유지하는 배타적 소유 혹은 독점은 필연 저항에 직면하게 되지요. 소위 정당성이 결여된 소유나 독점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당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유산이 어느 한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증여되었다면, 그것도 부모의 의사가 유언장이나 기타 방법으로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당연히 다른 자식들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재산이나 권력에 대한 자신의 배타적 소유 혹은 독점을 인정받으려면 그 정당성을 합리화시켜줄 무엇인가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한 편으로, 재산이나 권력을 분배받지 못한 자들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도구로서도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루소는 여기에 '사회와 법'이라고 대답합니다.


사회와 법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하여 자연적 치유를 아주 파괴해 버리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칙을 영구히 고착화 시켰으며, 교활한 횡령을 확정적 권리로 만들어 몇몇 야심가를 위해 인류 전체를 노동과 굴레와 비참에 예속시켰다.


-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89p.


정당한 통치를 위한 잘 짜여진 이론적 토대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단지 법률의 형태만 취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형태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들의 공통적인 역할은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소유와 불평등의 법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최종적으로 국가가 정부라는 형태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모든 자연인의 권리를 위임해 가고 본래의 자연권을 제한합니다. 그것이 아테네식 민주정이던, 고대의 전제군주제던, 중세의 봉건제던 말입니다.


루소가 살던 시절의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국가가 전제군주정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절대왕정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 유럽의 각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가나 부르봉 왕가 같은 전제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나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몇몇 공화국들은 절대왕정국가의 강력한 힘 앞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지요. 이런 시대적 상황을 목도하던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제군주제가 서서히 그 추악한 머리를 들어 국가의 온갖 분야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하고 건전한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마침내 법과 인민을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무질서와 대변혁 속에서다. 이 최후의 변화 이전의 시기는 혼란과 대재앙의 시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 괴물(전제군주제)에 의해 삼켜져 버릴 것이다.


인민은 더 이상 지도자나 법이 아닌 전제군주만을 가질 것이다. 그 순간부터는 이제 미풍양속과 미덕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제군주제("그 안에서는 정직한 행동에 대한 아무 믿음도 없다")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전제군주 외에 어떠한 다른 지배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청렴이나 의무는 없어져 버리고, 노예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 뿐이다.


바로 여기가 불평등의 최후 지점이며, 원을 다 그릴 때 만나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인 것이다.


-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215~216pp.


오로지 한 사람만이 자유로운 국가. 모두가 그 자유를 빼앗기고 절대권력자 한 사람만이 자유로운 그런 국가야말로 불평등의 최후에 있는 국가일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전제군주제'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태는 바뀌어도 본질이 똑같다면 불평등의 절대화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작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국가를 통해 경고하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멀리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바로 위에 있는 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수령 한 사람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맹목적인 복종이 강요되고 그것이 미덕이 되는 나라.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그런 북한의 모습을 가리켜 '회색광장'이라고 표현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드러난 루소의 생각을 따라와 봤습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문장이 길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비유를 드는데다 번역본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나 루소의 사상만큼은 잘 드러납니다. 읽다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의 사상이 후대의 철학자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이나 사상에서 루소의 오마주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후대를 살았던 마르크스가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마르크스 외에도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론' 정도는 우리 같은 일반인도 그 이름을 알 정도니 영향이 적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자 다시 헌법제11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화국 시민인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아니하며 살고 있습니까? 법과 공권력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제한하려는 사람들의 횡포를 루소가 목격했다면 그는 어떤 말을 했을까요? 도대체 국가라는 존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법 앞에 불평등하다고 느꼈다면 그 불평등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인류는 왜 전제군주정을 타도하고 민주공화정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을까요? 끊임없는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책은 답을 주기보다는 거의 이렇게 더 많은 질문을 남겨주고는 하지요.


이 질문들이 쌓이고 여기에 대답을 해보려는 노력들이 바로 인류의 역사와 지성을 진보시켜온 동력입니다. 그렇기에 인류가 전제군주제와 계급제의 사슬을 끊고 오늘날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답을 얻지 못했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이 질문들이 미래의 인류진보를 위한 초석이 될테니까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넘어 어제를 고찰하고 내일을 엿보려 했던 루소처럼 우리는 우리 당대의 시대를 치열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