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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여자
국내도서
저자 : 엔도 슈사쿠 / 이평춘역
출판 : 어문학사 200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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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말이 넘쳐납니다. 드라마와 영화, 유행가 가사에까지도 사랑 이야기를 빼놓으면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영악한 자본은 자녀와 부모 혹은 스승의 의미를 기리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나눠보자는 날마저 놓치지 않습니다. "자녀(아니면 부모님 혹은 스승)에게 사랑을 표현해 보세요~"라나 뭐라나. 극적이어야만 감동할 수 있는 사랑. 무언가 물질로 표현해야만 인정받는 사랑.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이유도,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냥 남들이 하는대로, 관례상 하던대로 하면 그만일테니까요.


사랑의 참의미를 고민하게 해준 『깊은 강』으로 만났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두 번째 읽게 됐습니다. 『내가 버린 여자』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제목이 이 작품의 줄거리를 단 번에 정리해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요시오카라는 남자가 자신의 욕정을 위해 미츠라는 여자를 이용하고 버리는, 꽤나 통속적인 내용입니다. 요시오카의 관점에서 씌여진 '나의 수기'라는 부분과 미츠의 시점에서 씌여진 '손목의 반점'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성향은 극단적으로 대립됩니다.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요시오카와 순진하고 동정심이 많은 미츠는 애초에 어울릴 수 없는 인물들이었지요.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다는 말. 저 스스로에게, 독자님들께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요시오카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며 흠칫 했다면 마냥 남의 이야기로 비웃고 지나갈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자가 생겼으면 좋겠다.'

야간 천한 불평을 털어놓아 죄송하지만, 이것이 당사의 나와 나가시마의 심정이었다. 돈이 없는 것은 물론, 질긴 나일론 양말의 등장과 더불어 가장 먼저 억척스러워진 당시의 젊은 여성들은 빈털터리인 아르바이트 학생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돈이 생겼으면 좋겠어. 여자와 놀고 싶어."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은 나도 나가시마도 마스크를 쓰고 솜이 비어져 나온 이부자리에 엎드려 그렇게 신세한탄을 했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내가 버린 여자』, 어문학사, 2007, 9p.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은 요시오카나 그의 친구인 나가시마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닙니다. 남성들이 가진 일반적인 욕망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남자들은 다 그렇다구요? 글쎄요. 여성들이라고 다를까요? 저는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예외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뜨끔한 부분이지요.


빈곤한 젊음을 보내던 요시오카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학력자본, 즉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자신보다 못배우고 인물도 빼어나지 않은 미츠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려는 흉계는 미츠의 거부로 쉽지 않았지만 미츠 특유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결국 성공하고야 맙니다. 속물과 엮인 순수한 사람은 대개 그렇듯이 이용당하고 마는 것이지요.


목적을 달성한 요시오카는 그대로 미츠와의 연락을 끊어버리고 둘은 각각의 삶을 살아갑니다. 요시오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회사에서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장 조카와 썸을 타며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요. 반면 미츠는 마사지 업소나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갑니다. 이 부분에서 엔도 슈사쿠 특유의 종교적인 질문이 던져집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이든 사랑하십니다라고 쓴 종이가 노인이 서 있는 뒤 벽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미츠의 눈에는 이 글씨가 무의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만일 하느님이 있다면, 왜 의미도 없이 나 같은 여자를 불행하게 하는 걸까?'

 

-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내가 버린 여자』, 어문학사, 2007, 207p.


모두를 사랑한다던 하나님.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 그 분은 어째서 죄 있는 자는 행복하게 하시고, 죄 없는 자를 불행하게도 하시는 것일까요. 성직자들은 보통 다 깊은 뜻이 있어서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끝내 불행으로 끝나버린 삶에 대해서도 '깊은 뜻'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가슴은 공허해 집니다. 무슨 사랑이 고생만 시키고 끝내는 경우가 있냐고.


한센씨병으로 진단받은 미츠가 격리병원에 들어가서 수녀에게 들은 말도 그랬습니다. 이 불행마저 '반드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녀가 그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인생이었다. 자신은 이제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별로 하지 않았다. 가와고에의 아버지가 새엄마를 데리고 왔을 때도 자신이 있으면 방해가 되리라고 생각하여 일하러 도쿄로 나왔다. 그리고 공장에서도 열심히 약 포장 일을 했다. 요시오카를 좋아했지만, 폐가 되지 않게끔 슬픔을 참으며 헤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비참한 병에 걸려 버렸다. 이제까지 손해만 보았다. 미츠는 자신이 바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 왔는데, 야마가타 수녀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내가 버린 여자』, 어문학사, 2007, 248p.


신의 공평한 사랑이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 미츠를 덮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녀가 말하는 큰 의미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일까요? 신의 기적이나 은총보다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가 많아서일까요? 신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의 감동만큼도, 으레 연례행사가 되어 받는 선물 같은 것의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큰 의미가 있다'는 말 다음에 붙은 '그러니 참고 기다려라'는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해서 일까요?


신의 문제는 신의 뜻일테니 더 이상 고민해봐야 어떤 답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은 결코 인간에게 대답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발견하고 알게되면서 그나마 이정도라도 가지고 있는 나를 안도해하고 그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면서 자위하고 말겠지요. 고작 남의 불행을 비춰봐야 알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비겁한 사랑 아닐까요.


신이 개입하는 사랑은 바이블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선택받은 몇몇 사람과 그 종족이 누린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사랑. 그것이 만들어낸 기적들. 이런 것들은 증명되지도 않고 내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각자를 아끼고 보살펴서 증명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처럼 말입니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뒤에서 신의 오마주를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느낄 때지요.


"이 병은 병 자체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에요.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병에 걸린 사람들하고 달리 이제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던 가족에게도, 남편에게도, 연인에게도, 아이에게도 버림받고 외톨이가 되기 때문에 불행한 거에요."


-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내가 버린 여자』, 어문학사, 2007, 246p.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이 시험에 들었을 때, 그래서 결국 그 사랑이 배신 당했을 때 우리는 불행을 느낍니다. 신을 원망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말은 공허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배신 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배신 당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가족과 남편, 연인, 아이로부터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미츠와의 만남과 그 이후의 삶을 반추한 요시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시 나는 신 같은 것은 믿지 않았지만, 만일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이러한 하찮고 평범한 일상의 우연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드러내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현대에 이상적인 여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나는 지금 그녀를 성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내가 버린 여자』, 어문학사, 2007, 29~30pp.


사랑을 실현할 존재가 신이 아닌 우리 자신임을 잊을 때 우리는 불행해 집니다. 그것을 종교를 통해 얻으려고 하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환상만을 보려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지요. 요시오카가 세속적 욕망과 출세를 선택했기 때문에 버린 것은 미츠로 그려진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요시오카처럼 중요한 것들을 버리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넘쳐나는 사랑이란 말 중에서 오늘 우리가 버린 진짜 사랑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reapasisow.tistory.com BlogIcon mr.leedk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 이어 이 서평을 읽습니다. ^^ 엔도슈사쿠는 카톨릭 문학을 많이 써서 침묵 같은 책을 읽었는데, 여기에 더 직접적이고 심오한 책이 한권 더 있었군요. 작성하신 서평의 문장하나하나 너무 공감이 됩니다.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로 그리고 글로 표현이 안 되었던 것들이네요. 저도 교회를 다니면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참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을 속이는 듯한 느낌이지만 감동이 되기도 했구요. 사랑합니다 라고 성도들간에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 아무런 감동도 느낄수없었죠. 실은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요. ㅎ 성도들간에.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관심도 없고 목사님들도 그저 교세 확장이 최우선이죠 ^^ 성도들이 교회가는 이유는 저주 안받기 위해 혹은 축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목사님들은 그런 공포심을 적당히 조장하구요.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저 같은 나일롱 못해 신앙만 있는 건 아니고 정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어쨋든 고통의 문제는 모태신앙인에게 참 가슴에 와닿는 주제입니다. 왜 조물주는 고통을 주었을까? 엔도 슈샤쿠, 필립얀시, cs루이스 등을 읽으며 한때 정답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설명 외에 딱히 답은 없는 거 같네요...
    2016.07.30 00:0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ookplayground.com BlogIcon 한량의독서 댓글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에 대해 고민하시는 선생님의 고뇌와 열정이 느껴집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인데 '세상에는 답이 있는 문제보다 답이 없는 문제가 훨씬 많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어려운 질문을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지금 그 모습, 오래도록 간직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2016.08.06 2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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