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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다가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게 됐다. 갈색털이 도드라진 귀여운 아기고양이였다. 어차피 녀석들의 습성상 내가 다가가 예뻐해 주려고 한들 도망가고 말터이니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하지만 녀석은 내 시선을 어느 정도 받는가 싶더니 결국 두려움이 가득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망가고 말았다. 사실 이 녀석이 밥(그냥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정체도 알 수 없는 걸 먹겠다고 할짝 거리고 있었다)을 먹고 있었고, 이어 물을 마시는지라(역시 길가 작은 웅덩이에 아무렇게나 고인 물을 마시려고 했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기고양이는 결국 자동차 아래로 후다닥 도망을 가서는 내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나를 곁눈질했다. 나는 그냥 돌아섰다. 그것이 내가 아기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원래 내가 의도했던 녀석의 먹고사니즘이 해결될 판이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에 작은 고양이와 있었던 일이었지만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고양이는 도시에 사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야생성이 강한 녀석들이었다. 만약 시골 어느 집에 살았다면 인간의 눈치를 보면서 더러운 물을 마시고 도망다니며 먹이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 멋대로 먹을 것을 구하고 맑을 물을 찾아가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편의에 지극히 최적화된 공간인 도시에 고양이같은 동물이 머물 공간은 없었다. 그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환경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그 부산물을 통해 생존을 유지하는 고양이가 놀라울 뿐이었다. 고양이의 눈으로 바라본 이 도시의 환경은 어떻게 보일까? 우리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운송수단인 자동차는 고양이에게 일격필살의 흉기로 보일 수도 있고 그 자동차가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는 쿠션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걷고 달리기 힘든 돌포장길일 것 같았다. 고양이가 되보지는 않아서 명확히 뭐라 짚어말하기는 어렵지만 동물들의 눈에 도시는 매우 위험천만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느꼈다.


 

요새 유행하는 '유체이탈 화법'이란 말처럼 인간이라는 자의식과 육체적 존재를 떠나 다른 생명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전혀 새로운 것이 보인다. 당신의 의식이 당신의 몸을 유체이탈하여 또다른 생명에 깃들었다고 상상해보라. 100% 이해할 수는 없다해도 부분적이나마 신선한 관점에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와 몇 번 들렀던 성북동의 한 치킨점은 길가에서 장작불에 구워지는 닭의 모습을 볼 수 있게끔 꾸며져 있었다. 장작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며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훈제치킨의 시각적 효과는 그 맛은 둘째치더라도 지나는 행인의 발걸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가게는 항상 만원이었고 빈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인기였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다. , 그런데 당신이 지금 유체이탈하여 닭의 몸에 자리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과 같은 닭들이 수십 마리나 털을 몽땅 뽑히고 목이나 발이 잘린 채로 장작불에 구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인간의 의식과 몸을 가지고 사는데 익숙해서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생명을 해하고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예 의식이나 생각이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어느 경우에는 해하고 이용하는 대상에 동종인 인간도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애국적이란 목적 등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경우에도 거리낌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애국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른 종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는 상상은 일본만화인 <기생수>라는 작품에 잘 표현돼 있다. 3 수험생 시절 학교에서 자정쯤 야자(야간자율학습. 전혀 자율이 아니었으나 고유명사가 된 '야자'란 말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율이란 말을 썼다)가 끝나면 학교 후문에 있는 만화방에 가서 아예 시리즈 전체를 빌려 밤을 새며 만화를 봤다. 권당 대여료가 50원 밖에 하지 않았으니 이런 호사가 없었다. 정말 희한한 만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작품이 바로 <기생수>였다. 스토리는 간단했다. 외계의 고등생명체가 지구에 침입해 인간의 몸에 '기생'하면서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내러티브였다. 하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먹이사슬에서 인간의 위에 존재하는 포식자가 존재한다는 것,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지닌 생명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공포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우주의 구석에 존재하는 티끌만한 생명으로서 타생명체에 대한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기생수>에서 인간인 주인공이 인간을 해치는 외계생명체에게 비난을 퍼붓자 외계생명체가 비웃으며 던진 말은 지금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너희도 소나 돼지를 죽여서 잡아먹지 않아? 소나 돼지가 보기에는 너희도 우리와 같은 존재로 보일 거라고. 어째서 인간만이 먹이사슬의 최상에 올라 다른 생명을 마음껏 죽여도 되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동식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주셨다는 성경적 도그마는 당시에도 믿지 않았다. 허나 주입식 교육에 숨구멍이 막혀있던 고3에게 생명과 윤리,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준 이 대사는 만화에서 건진 몇 안되는 자산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신작 <제노사이드> 역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등장한다는 픽션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과 평화의 의미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지적으로 현생인류를 월등히 능가하는 초인류가 등장하고, 이에 대처하는 몇 개 그룹의 활동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건의 시작과 끝까지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는 회상씬과 뒤늦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거스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건의 발생에서 전개, 결말까지 빠르고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제노사이드>는 거의 7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인데 이걸 내가 이틀만에 주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의 흡입력과 빠른 전개속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요 체크포인트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피냄새 진동하는 전장에 뛰어든 용병 '예거'와 그 일행, 새로운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비밀요원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대학원생 '고가 겐토'와 그의 친구 이정훈(이 캐릭터가 한국인 유학생으로 나와서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_-;), 마지막으로 초강대국 미국의 비밀정보에 근접해 있으면서 권력자들을 관찰하는 천재연구원 '루벤스'와 그 주변, 이렇게 세 곳이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무시무시하지만 소설이 펼쳐지는 지리적 스케일도 일본과 미국, 콩고민주공화국(이전에 자이르라 불렸고... 내전 중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피비린내나는 제노사이드가 자행됐던 바로 그 나라다) 등 전세계를 아우른다. 더 이상 스포했다가는 잠재적 독자에게 욕먹기 좋으니 작품에 대한 안내는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 마지막 팁이라면 책을 덮고 나서 재밌고 좋은 영화 한 편 잘 보고난 느낌이었다. (소설도 재밌고 유익한 -좋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란 의미다)

 

<제노사이드>에서 현인류의 지능을 초월하는 초인류의 등장이란 설정은 픽션이지만 그 외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인물, 기관 등은 상당히 논픽션적이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맨 마지막 장에는 저자의 '감사의 글'과 함께 주요 참고 서적이 기재되어 있는데 마냥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소설을 쓰는데 전문가들의 조언과 고증이 큰 도움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학계와 언론계의 전문가들을 통해 확보한 정확한 팩트를 기반으로 썼기 때문에 소설 전체적으로 초인류 '아키리''에마'의 등장(혹은 그들이 만들거나 관련된 어떤)을 빼고는 상당히 사실적이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너무 사실적으로 소설을 그리다보니 어느 부분에서는 상상력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한 예로는 초인류 '아키리''에마'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 행동을 그리는 장면이 많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물론 소설 속에서 초인류는 현인류의 지능과 사고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수준임을 여러 번 강조하지만 독자는 보도듣도 못한 초인류의 외모라던지, 사고, 행동이 틀림없이 궁금할 것이다. 저자가 여기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최대한 팩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작가적 조심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쥘 베른<해저2만리>에서 '노틸러스호'를 상세하게 묘사해내며 그 당시에는 상용화 되지도 않았던 잠수함이란 존재를 독자들에게 상상하게끔 했던 만큼만 표현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사진: AP)

 

작가에 대한 소개와 평가를 빼놓을 수 없다. 소설 곳곳에서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해 예거나 고가 겐토, 루벤스 등의 관점에서 논평을 하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그런 짧은 논평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평화주의자에 반전/반인종주의자이고 무엇보다도 휴머니스트라고 보여진다. 소설에서 예거 일행이 콩고에서 목격한 대학살과 납치, 강간 등의 묘사는 잔인하리만큼 정확했고, 특히 예거 일행을 죽이러 교회 옥상으로 돌진해 오는 소년병들에게 반격하는 장면은 읽고 있기 힘들었다. (한 소년병의 이야기를 삽입해 그들이 소년의 몸으로 어떻게 AK-47 소총을 들게 됐는지까지 상세하게 묘사해 뒀다. 끔찍하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평화와 인간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를 위한 작가의 반어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서 저자는 예거 일행이 느끼는 감정이나 양심적 고뇌 등을 부연하면서 진짜 의도를 드러내고는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로, 소설 초반에서 한국인 유학생인 이정훈이 등장할 때, 고가 겐토가 '조센징'이나 '시나징'을 극도로 경멸하는 그의 할아버지나 큰아버지와 다툰 일화를 그리며 "일본인의 (잔혹성 등의) 무서움을 일본인을 알지 못한다"고 평한 부분은 분명 그 근거라 보여진다.


 

그렇다고 작가가 완전 이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그는 루벤스의 관점을 취한 다음, 정치권력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냉소적인 하이즈먼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과 정치권력의 속살을 글로 옮겨두기도 했다. 하이즈먼 박사는 정치권력을 경멸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싫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만큼 냉소적인 인물이지만, 박사의 입을 통해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본성과 행동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다. 너무도 불완전하고 사리사욕에 쉽게 무너지는 한 인간에게 정치권력이란 거대 권력이 어떻게 악용되는가에 대해서도 하이즈먼 박사의 말은 거침 없이 터져나온다. 소설에서 미국대통령으로 나오는 그레고리 S. 번즈라는 인물은 좋게 그려지지도 못하지만 소설 내내 하이즈먼 박사를 비롯 많은 인물로 부터 바보로 비웃음을 당하기도 한다. 그는 잔혹할 뿐더러 어리석기까지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레고리 S. 번즈라는 미국대통령은 아무래도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전 미국대통령을 모델로 한 듯 하다. 완고하고 거대한 아버지에 짓눌린 성장과정, 사업하다 말아먹고서 기도 중 계시를 받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인, 이라크 전을 개전한 대통령 등 거의 부시를 모델로 창조한 캐릭터라고 본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인간상은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겁많고 나약하고 계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적인 본성에 저항하여 이타적 행위를 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그걸 극복하고자 한다. 고가 겐토는 일개 평범한 대학원생에서 희귀병으로 죽어가는 전세계 10여만명의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테러와 납치의 위협 속에서도 진정한 약학자로 거듭난다두려움이라는 본능을 극복하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고가 켄토의 모습이야말로 저자가 바라는 롤모델이며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건네는 인간적인 부탁이 아니었을까 (고가 겐토를 돕는 한국인 유학생 이정훈의 실제모델이 일본에서 의사한 이수현 씨였다는 작가의 인터뷰가 기사가 있었다) 


 

<과학콘서트>란 책으로 유명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한 칼럼에서 "자살은 인간만이 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지만 인간은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동종을 '제노사이드'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제노사이드의 출발은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제노포비아에서 시작한다. 우리 주위에도 사례는 널려있다. 이명박 대통령 각하의 두터운 신임 속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연임에 성공하신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20107월 사법연수원에서 하셨다는 어록이 대표적일 것 같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는 다문화사회가 됐어요. '깜둥이'도 같이 살고..."라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현 위원장의 속이 안되봐서 모르겠지만(뭐든 다 해봐서 아시는 분은 대한민국에 오직 한 분이시다) 분명 '깜둥이'라는 말이 호의적이거나 존중해서 나온 표현은 아닐 것이며 그 속에는 제노포비아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비단 현 위원장 뿐 아니라 만원인 버스나 지하철에서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옆자리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가 내재하고 있는 제노포비아적 불안요소는 충분하다. 이것이 어떤 기폭제에 자극을 받는다면 엄청난 제노사이드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두렵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란 자부심으로 본능을 이겨내기를 바랄 뿐이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영화 <그르바비차>는 제노포비아와 제노사이드가 남긴 상처를 그린 영화다. 아빠를 전쟁용사로 기억하는 딸이 "아빠는 누구냐?"는 질문을 질기게 던지자 결국 인종간 집단강간을 통해 너를 낳게 되었다는 아픈 고백을 하는 엄마를 그린 이 영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92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는 인종청소를 자행해 95년까지 이슬람계 사람 25만명을 죽이고 160만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더욱이 인종말살의 목적으로 이슬람계 여성 2만여명을 집단강간하고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감금하는 등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그르바비차'는 그 피해가 가장 심했던 마을의 이름이고 영화에서 엄마는 그 피해로 딸을 낳게 된 것이다. 2007년 보스니아 정부는 강간피해자를 전쟁피해자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녀들을 위한 정부지원금은 월 15유로-우리 돈으로 약 22,500-에 불과하다 - EBS지식채널e 제작팀, <지식e 3>, 북하우스, 2008, 210~221pp에서 재인용) 영국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이 1930년대 이미 "현재의 생산력으로만으로도 전인류가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물질적 토대는 완성되어 있다"고 했던 것이 지난 세기 초였으나, 그 세기 말에 인간은 함께 번영하기는 커녕 또다시 어리석게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되풀이 했다. 지난 세기 초 일제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신음했던 우리가 이번 세기에 돈 좀 벌었다고 "사장님 나빠요"라는 개그를 보고 웃는 것은 그래서 마냥 웃고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경계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악령은 우리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언제든 튀어나와 악마적 본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노사이드>에서 하이즈먼 박사가 루벤스와 헤어지는 자리에서 던진 질문으로 마무리 하려 한다. 그는 본질적이면서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을 던지며 집으로 들어간다. 심술궂은 노교수의 질문은 역시 답변하기 쉽지 않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이제 독자 여러분 각각의 몫으로 남겨졌다. 나는 유체이탈하여 고양이가 되거나, 혹은 초인류가 되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당신도 당신의 방법으로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럼 건투를 빈다!

 

 

"지금 지구상에 살아남은 65억의 인간은 100년 정도 지나면 다 죽을 걸세. 그런데 이렇게 서로 죽여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P.S)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인터뷰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다. 한국일보에 난 기사를 서비스로 달아둔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7/h20120708203227863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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