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관광차 전주라는 도시에 가면 빠질 수 없는 관광명소 중에 '덕진공원'이란 곳이 있다. 풍수적으로 전주라는 도시가 산으로 둘러쌓인 동, , 남쪽에 비해 북쪽이 뚫려 있어 지기가 빠지지 말라고 전주의 북쪽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덕진 연못이란 설이 있다. (덕진 연못의 덕진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그 근처에 있던 작은 나루터인 '덕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연못이 관광명소가 된 이유는 두 가지쯤 된다. 첫 번째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때문이고 두 번째는 8월쯤 연못을 가득 채우도록 피는 '연꽃' 때문이다. 연꽃이 장관인 덕진 연못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현수교를 건너면서 연꽃을 구경한다. (연꽃은 꽤나 크고 그 안에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동전을 던져 빠지지 않고 안착하면 연인과는 백년해로 하고, 솔로라면 연인이 생긴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불교에서도 숭상하는 꽃이니만큼 연꽃을 구경하려는 사람이 북새통이지만 정작 그 아래 물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연꽃이 불교의 꽃이 된 이유를 알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감이 올 것이다. 맞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 자라지 않는다. 더럽고 탁한 물에서 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 바로 연꽃이다. 물론 덕진 연못의 수질도 매우 나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러운 물에서 피어난 연꽃을 보려 인산인해다. 덕진 연못은 수질 유지를 위해 몇 년에 한 번씩 연못 전체의 물을 퍼내고 다시 채워넣는 대대적인 사업을 벌이는데, 연못 바닥에서 수거되는 동전이 수 억원에 이른다니 관광객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기 어렵지 않다.

 

아름다운 존재, 편리한 존재, 향긋한 존재들의 이면과 뿌리를 일부러 찾아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움직임이 조금씩 일고 있다. 공정무역커피가 대표적이다. 부당한 노동력 착취로 생산된 커피들과 자본에 저항하는 의미로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커피를 소비하자는, 일종의 윤리적 소비의 한 형태다. 향긋하고 맛있는 커피 뒤에 숨겨진 노동착취와 불공정 거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저항이 잉태한 소비자 운동이다. 윤리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에게는 도덕적 만족감을 주고, 커피 생산자에게는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이 거래는 인류가 지닌 도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우리의 주위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물들의 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문제가 비단 커피 만의 문제가 아님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주위 아름다운 연꽃들의 모태가 대개 더러운 연못물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저자
피터 노왁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말랑말랑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버려라! 음탕...
가격비교


피터 노왁이 쓰고 이은진이 옮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는 아름답고 편리한 연꽃을 탄생시킨 기술의 뿌리가 섹스, 폭탄, 햄버거로 대표되는 인간 욕망임을 밝힌 책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 , >와 흡사한 제목이다. 다이아몬드가 인류 문명의 흐름을 결정한 세 가지 요소로 총, , 쇠로 꼽았다면 노왁은 현대문명을 주도하는 요소가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우리의 일상을 함께 하고 있는 가전제품에서부터 음식들, 인터넷 등 매우 넒고 다양한 분야의 뿌리를 근거로 한다. 가장 쉽게 예로 들어볼 수 있는 것이 마트나 슈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조림 식품들이다.


"군인은 위장으로 전진한다"는 말로도 유명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행군하는 동안 군인들을 잘 먹이고 영양 상태도 좋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식품 보관 및 저장 기술이 일천했던 18세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1795, 나폴레옹은 대회를 개최한다고 공표했다. 누구든 군대를 먹이는 데 도움이 되는 식품 저장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사비를 털어 상금으로 12천프랑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왕의 몸값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많은 이들이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1810, 니콜라 아페르는 고기나 채소 같은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공정을 발견했다. 캔버스 천을 덮고 삶은 유리병에 밀봉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식품에 담긴 수분을 밀봉해서 저장 기간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

 

얼마 안 있어 피에르 듀랑이 아페르가 발견한 방식을 개선했다. 듀랑은 유리병 대신 양철통을 사용했다. 요리를 하든 저장을 하든 양철통이 유리병보다 더 나았다. 거기다 이동에 필요한 내구성까지 겸비했다. 그러나 현대 식품 저장 및 가공 기술의 발명자요 통조림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은 듀랑이 아니라 아페르다. 그때부터 식품가공의 역사는 사실상 전쟁의 역사와 발을 맞추어 발전했다.

 

- 피터 노왁, 이은진 역,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2012, 문학동네, 76~77pp.

 

통조림의 발명이 유럽정복을 노리던 나폴레옹의 군사적 요구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고, 동구를 넘어 러시아로 행군했던 나폴레옹에게 많은 군인들을 먹일 식량을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하는 문제야말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의 절실했던 군사적 이유로 탄생한 것이 지금 우리가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조림 식품들이다. 허나 나폴레옹이 전쟁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지금껏 탄생하지 않았거나 훨씬 늦게나 나왔을 통조림을 보면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위해 탄생한 통조림의 뿌리를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주변에 김치나 야채 종류는 잘 먹지 않으면서도 통조림햄 '스팸' 하나면 밥을 몇 그릇도 먹을 수 있다는 육식주의자가 몇 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에는 섹스로 대표되는 포르노 산업, 폭탄으로 상징되는 전쟁, 패스트푸드가 대변하는 식품산업들에 쓰인 첨단기술과 경영기법들이 인간의 부끄러운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응용되었음을 밝히는 근거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궁금하면 500... 이 아니라 17,000-인터넷서점에서는 10% 할인된 15,300-에 확인해 볼 수 있다) 노왁 역시도 이를 가르켜 '부끄러운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상당히 가치중립적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는 인간존재의 부끄러움을 되돌아 보게 한다. 인간의 육탐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가는 가축들의 도살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음 아파하면서도 정작 고기를 먹으러 가면 꽃등심을 찾는 인간존재의 한계와 인간의 모순된 태도 때문이랄까. 노왁은 마지막 장 '악덕이 베푸는 미덕'에서 "본능에 호소하는 자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호소하는 자이며 누구보다 가장 빠른 반응을 얻늗다"는 미국 철학자 애모스 브론슨 올컷 Amos Bronson Alcott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결국 욕망의 삼위일체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 살던 중국에 살던 그 어디에 살던, 전쟁과 포르노와 패스트푸드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신기술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섹스와 폭탄과 버거는 계속해서 우리가 속한 세상과 우리의 삶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빚어나갈 것이다.

 

- 피터 노왁, 이은진 역,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2012, 문학동네, 405p.


뒤로는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앞에선 도덕이란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한국의 자칭 보수들이 좋아할 결론일까 싫어할 결론일까.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그 분의 명언이 떠오른다.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정치인 망언 중 '이것이 폭탄입니다'와 자웅을 겨루는 수위권 망언이라고는 하더니만)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욕망의 카르텔이 드러나서 불쾌할지, 아니면 '지금 이대로!'라서 유쾌할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빵집 주인의 이기심 때문에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이란 애덤 스미스의 말을 후배 경제학자들이 제 입맛대로 해석하듯이, 노왁의 결론 역시 보는 이에 따라 제 각각의 해석이 될 것이라 여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가 지닌 도덕성과 윤리의식으로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본능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류전체의 미래상은 상당히 암울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존재 자체의 무거움과 폐스러움을 느껴본 일이 있는가? 인간 존재로서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 개개인은 얼마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자연을 파괴하는지 모른다. 오롯하게 자기 힘으로 환경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생존하고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가져다 쓰면서 정작 벌어진 환경파괴에는 나몰라라 하는 실정이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저개발국의 사람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형편이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 사람들이 연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동안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 사람들은 어두운 연못 가운데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 더러운 연못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의 혜택이 일부에게 독점되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악취나는 물에서 탄생한 연꽃의 태생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연꽃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큰 욕심일까? 부끄러운 '욕망의 삼위일체'는 지금 우리에게 어느만큼 도덕적이고 본능적일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