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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은 크게 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론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로 그 흐름이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18년간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독재자 박정희가 10.26사태로 비명횡사하게 된 사건은 바로 그런 예에 속한다. 박정희의 급작스런 죽음에 무주공산이 되버린 권력을 두고 3김이 김칫국을 마시고 있을 때, 군사독재권력 아래서 착실히 조직을 다져온 정치군인 전두환이 눈을 번뜩였다. 영남 출신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하나회791212일 밤, 모의한 쿠데타에 돌입했다.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전격 체포하고 이에 반발할 것으로 예상됐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을 연회로 초청해 눈길을 돌려놨다. 자신의 부대라고 믿었던 수도경비사령부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던 장태완은 저항 한 번 못하고 신군부에 체포됐고,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총을 맞고 연행됐다. 이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최규하를 하야시키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 버린다. 그렇게 1212일 그 날 밤은 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운명이 갈린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수경사령관 장태완. 그 둘의 전투는 전두환의 승리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장태완의 패배는 80년대 군부독재를 열어준 역사적 비극이기도 했지만 장태완 본인의 개인적 아픔이기도 했다. 장태완이 신군부에 체포되고 서빙고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자,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82년에는 서울대 자연대에 진학했던 장태완의 아들 성호 씨(당시 20)가 행방불명된 후 조부의 묘소 근처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장태완은 크게 낙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장태완은 재향군인회 회장과 코스콤 회장,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 후 20107월 폐암으로 별세했다. 하지만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부인 이병호 씨가 남편마저 없자 결국 올해 1월에 자택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군사독재의 80년대 오마쥬가 아직도 설치는 것 마냥 장태완의 일가 마주친 시련도 아직 진행형이었다. 남은 유가족은 딸 장현리 씨 외에는 없다. 그 역시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상처를 입고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고 한다.

 

 

비극으로 끝나버린 장태완 일가의 운명과는 달리 전두환 일가의 호의호식은 분에 넘쳐 보인다. 아직도 어딜 가든 각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VIP로 대접받고 있다. 연희동 자택 경호와 경호실 건물 임대사용의 법적근거가 미약해 시비거리가 되는가 하면, 전두환의 모교인 대구공고에서는 큰절을 받으며 만수무강 하시라는 축사까지 받고 다닌다. 최근에 문제가 된 육사 사열논란에서는 여전히 각잡힌 거수경례로 전직 쿠데타군 수괴로서의 면모를 보였는가 하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각하 나이스샷!’의 찬사 속에 라운딩을 즐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미국 예일대 경영대 학생들 20여명을 연희동으로 불러다가 강연까지 하셨다니 국제적 입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셨다 하겠다. 더욱이 그 영광을 본인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 , 사위, 며느리, 손자까지 물려주며 살고 있다. 손녀는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여기는 강호동, 전지현 같은 톱스타들이 결혼한 VIP홀이다)에서 윤인구 아나운서의 사회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 동생인 전경환, 장남 전재용, 차남 전재국 등 가족 모두가 매우 유명한 스타들이니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전두환이 하도 잘산다며 설치고 다녀서 그 반대에 섰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나 찾아다녀봤다. 대표적으로 전두환의 쿠데타에 맞선 장태완 일가를 추적해 봤다. 주지의 사실대로 장태완의 장남은 82년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이병호 여사는 사망했으므로 남은 유가족은 딸 장현리 씨 뿐이었다. 장현리 씨를 만나보기 위해 이병호 여사가 살았던 강남 타워팰리스 옆 우성아파트로 가서 사정을 들어봤다. 부근을 취재하다보니 이 여사 살아생전에 친했다는 한 70대 노인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여사의 사망 후에는 교류가 없으며 그 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수소문 하여 찾아간 이 여사의 집은 현재 다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비어버린 아파트를 전세로 돌려 세를 준 것으로 파악됐다. 전세차 계약을 주선한 부동산을 찾아가 장현리 씨와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부동산 관계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시고 있다. 조심스럽지만 말씀은 드려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장 씨의 대답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어떤 매체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을 해 본 결과, 장 씨는 근처 재개발된 모 아파트에 살면서 친정에 자주 들르며 살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모친의 사망 후 분당으로 혹은 역삼동으로 이사하고 동네에는 발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 여사가 거주한 아파트 경비원 역시 만나주지 않을텐데... 그런 거 하시는 분이 아니야. 만나더라도 인터뷰하기 힘들거야는 말을 했다. 남편은 행시 출신으로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알려진 박 모 씨로 현재는 모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차마 거절하는 이의 남편까지 찾아가 설득하기에는 그 상처가 걱정돼 멈췄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 상처 많은 세월이 어쩌면 철저한 고립을 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맛이 좋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모순된 현실은 죄를 짓고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당당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불법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재임 시 엄청난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탄압한 사실은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 5.18 광주의 아픔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사실을 알고도 전두환은 떵떵거리며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취미로 골프 라운딩을 즐긴다. 여기에 상당수 사람들은 각하 오셨습니까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극진히 대접한다. 이게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받을만한 대우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든다. 반면 쿠데타 반란군에 맞서 싸웠던 이들과 그 가족들은 고통스런 시기를 보내야 했다. 장태완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앞서와 같고,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결국 1989년 남한강가에서 목을 매 숨졌다.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신군부에 저항하다 사살됐고 그 아내마저 충격으로 실명하고 말았다. 본인이 목숨을 잃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희생된 이들의 모습에서 명예회복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명예를 전두환이 훔쳐갔을까 싶을 정도로 숨죽여서 상처난 삶을 살아가는 현실에서 누군가는 악당이 되어야 잘 산다는 생각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두환 육사 사열 논란이 벌어진 후 화랑대에서 한 육사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보도자료를 통해 입장을 밝힌 만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육사 내부에서도 시덥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거절한 그를 뒤로 하고 시덥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봤다. 무슨 의미였는지 당최 감이 오지 않았다. 유감이라는 걸까, 별 거 아닌데 야단이라는 뜻일까.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군인들이 쿠데타의 수괴자 독재자였던 전두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군인이라면 작은 역사의식만 가져도 그 대답은 명확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박정희, 전두환이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데서 등골이 서늘하다. 종북 판별법을 만들자거나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청원과 댓글들을 보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음을 느낀다.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그 길가에 수많은 피를 뿌려야 하는 가시밭길이지만, 그 반동은 과거의 독재자가 마신 시바스 리갈을 향수하는 우리네 욕망을 통해 너무도 쉽게 고속도로로 내달린다. 연일 각종매체 1면을 장식하는 전두환, 박근혜 등 군사독재권력의 몸통들이 안내하는 반동의 고속도로 종착점이 어딘지 기억하겠는가? 기억이 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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